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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단편소설집. 7개의 단편소설 수록.

이 소설들은 공통적으로

미숙함으로 인해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던 관계와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주로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를 서술하는 식인데, 그 시절에 있었던 일, 그 때의 감정을 서술하며 관계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감정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가 섬세해서 계속되는 감정의 파도가 버거울 정도. 

한 번에 다 읽기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너무 애틋하고 섬세하여 단편 영화를 한 편 본 듯하니 하나를 다 읽고 잊혀질 때쯤 또 하나를 꺼내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ㅎㅎ

 

1. 그 여름

학창시절 첫사랑 그리고 연인관계, 식어가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 보편적이지만 그렇기에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음.

 

2. 601,602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있을 법한, 실제로 있었을 만한 이야기. 남동생을 열렬히 원하는 집안의 여자아이와 옆집에 사는 친구이야기.

옆집 친구가 불쌍하면서도 자기 얘기가 아니지 않음에 비참함을 느낀다.

남자 아이를 낳지 못해 핍박을 받는 엄마의 곤란함을 목격하며 할머니를 싫어하게 되고, 남동생이 태어나며 역설적이지만 희망을 느낌. 사실 희망을 느꼈다는 건 내 주관적인 생각이고 '우리는 행복해질거야' 라고 주인공이 생각했지만 '정말 행복해질까' 하고 불안해 하면서 외면하려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만도 같다.

 

3. 지나가는 밤

자매 관계에 대한 이야기. 자매지만 친하지 않은 관계. 엄마의 기일때만 만나는 관계이다. 어릴 시절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애증은 있고, 서로가 필요하지만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움에서 오는 애틋함이 있다. 어쩐지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니나 자매를 떠올리게 한다.

 

4. 모래로 지은 집

이 책에서 긴 편에 속하는 두 소설 중 하나. 상처 투성이 '공무'와 나약한 '모래', 그리고 '나'의 이야기.

상처를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간상을 그려내고, '나약함'이란 무엇인가.. 하는 마음 이야기...

만남과 헤어짐, 사랑, 청춘, 용기 그리고 내가 공무와 모래를 통해 알아가는 '나'의 감정. 세사람의 성장통.

처음엔 밋밋하다고 느껴지는 소설이었는데 읽어갈수록 세 사람의 캐릭터에 스며들어 애틋한 감정이 느껴졌던 소설이다.

 

5. 고백

학창시절 친구와 있었던 이야기를 고백함.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레즈비언임을 밝혔을 때, 다른 친구와 '나'의 반응으로 인해 친구가 자살하고, 그 이후 틀어진 관계와, 다시 재회했을 때의 감정을 고백한다.

 

6. 손길

나를 거두어주었던 어렸지만 반짝였던 숙모에 대한 이야기. 예전 나를 잠시나마 키워주었던 숙모의 나이가 되어 느끼는 감정들과, 이별과 재회를 그려내었음.

 

7. 아치디에서

'하민'과 '랄도' 두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지만 사랑은 아니다. 두 사람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우정이라기엔 너무 애틋하고도 건조하다. 사랑의 양상이란 어떤것일까. 삶을 뒤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잠시 정체된 지점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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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나는 공무와 포옹하고 싶었다. 만약 내 옆에 모래가 있었더라도 나는 똑같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 애를 껴안아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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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골목 끝까지 걸어가 바닥에 침을 뱉었어. 입속에 고인 초콜릿의 단맛이 불쾌하게 느껴져서. 그 단맛이 입 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서. 그 때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참 더럽다고 생각했어. 더러운 말이라고.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경멸하고 또 경멸할 거리고 다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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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그 때의나는 생각했다. 겉으로는 울고 있는 모래를 달래면서도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모래를 단죄했다.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 다시 들어가놓고 나와 공무 앞에서 외롭다고 징징대다니. 모래의 등을 두드리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진짜 고통이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애처럼 울고 있다니.

(다른 사람의 슬픔을 단죄한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겉으로는 타인을 달래주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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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하지 못했다. 어느 한 사람 울지도 못하고, 완성되지 못한 문장만을 조금씩 흘려보낼 뿐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후 몇달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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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몰아붙이던 남자친구에게조차 나는 의존했었던 거지. 내가 내 힘으로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해 자꾸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했던 거야. 내가 기대어 서 있는 벽이 자꾸만 무너지고 벽이 아니라 나를 해치는 돌덩이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본인을 갉아먹는 관계인걸 알면서도 쉽사리 놓지 못하는 저 마음이 공감이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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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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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 것인지 여자로부터 배운 셈이라고 혜인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사람은 그런식으로 쉽게 행복해질 수 없는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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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민이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 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는 게 그녀에겐 올바르다는 가치의 문제라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할 때, 그래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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