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발견한 정말 재밌는 소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소설 일제 강점기 치하 당대 지식인, 지역 유지, 기생, 건달의 삶을 그려냄. 인물들의 어릴적부터 최후까지 줄거리를 따라 함께하기에 삶의 허무함도 느껴지고 애잔하기도 하다. 이야기 서술이 흡입력있고 전개가 빨라서 지루하지도 않고 분량이 제법 되는 것 같은데 정말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독립운동하는 내용도 있어 뭉클하였고, 각자가 처한 작금에 대한 입장과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을 읽는 재미도 있었다. 근데 이제 사랑의 낭만을 곁들인.. 어떻게 이런책을 미국에서.. 정말정말 재미있었고 드라마나 영화로 나와도 너무 좋을 것 같음!
+ 내용 중 옥희가 [그 일이 너와 나보다 중요하지 않니] 라고 했을때 정호가 갑자기 돌변하며 옥희한테 버럭했던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은 좀 의아했다. 그렇게 화를 낼만한 대사인지? 한순간에 옥희에 대한 마음을 단단히 접고 돌아설만한 대사였는지? 공감이 좀 안돼서 의아했다ㅎㅎ
자신이 아직도 굉장한 셀러브리티라고 생각하는 노작가가 자신을 극진히 대접해 온 한 호텔에 방문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본인이 다른 젊은 여자들에게 플러팅하는게 자기 입장에서는 사연있는 로맨스지만 상대방 여자에게는 그저 추접스러운 노인네가 들러붙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장면이 있다.
고전문학이나 어떤 소설들을 보면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남성의 여성편력을 주인공만의 심오한 사연, 혹은 주인공의 방황/일탈, 혹은 주인공의 성장에 필요한 매개체 쯤으로 제법 잘 포장하곤 하는데, 그걸 포장을 다 까버리고 현실적으로 민낯을 밝혀버린 느낌이었다. 사실 별 거 아닌 짧은 대사에 불과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제법 통쾌했음..
3. 용사 다케루와 마법 나라의 공주
본인은 여성의 편이라고 믿으며 ‘여성전용칸’에 들어가 시위를 하는 주인공. 주인공이 들이미는 카메라 앞에서 승객들은 겁에 질린다.
”저는 여성 편입니다. 이 칸은 일본의 남녀평등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열차 내부를 촬영하겠습니다! 이건 도촬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나가게. 당신 때문에 다들 무서워하고 있잖은가.“
이 장면은 주인공같은 사람들이 여성전용칸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라고 보여져서 오히려 웃겼다….
주인공은 그러던 중 갑자기 환각에 빠지게 되는데, 본인은 괴수를 물리치고 공주를 구해야하는 용사가 된다.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용사의 모험에 빗대어 그려내고 있는데 비유가 사실 그럴듯 하지 않아서 매끄럽게 연결이 잘 안되어 이해가 안 갔다. 물론 몇몇 대사는 굉장히 현실적이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저는 주어진 일을 다 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외모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말까지 들어야 합니까?”
여성 정치인을 비롯해 화제가 된 여성들에 대한 평가, 혹은 비난에는 겉모습과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점을 꼬집었다는 게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여성전용칸’ 과 주인공의 환각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나…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용사'의 이야기는 대충 느낌은 알겠는데 '여성전용칸'이 이야기속에 등장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실 주인공이 표방했던 '나는 여성의 편'은 그저 말뿐인 위선이었으며 주인공이 '용사'의 일을 겪고 진심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장치였으려나..? 잘 모르겠다.
4. 아기 띠와 불륜 초밥
사실 이 단편이 이 책을 사게 된 계기임. 광고에서 이 이야기를 봤는데 제법 흥미로웠음.
불륜 커플들이 모이기로 유명한 한 초밥집에 모유수유를 졸업한 아기를 데리고 한 여자가 식사를 하러 온다. 그 아기엄마는 제법 미식에 대한 견문이 넓어 보이고 붙임성도 좋아 떠들썩하게 식사를 하는데 그런 여자를 주변 남자들이 못마땅하게 본다.
'마사미가 경멸해야 할 사람은 그 여성이 아니라, 어쩌면 옆에 있는 남자가 아닐까. 그들이 이렇게 다림질이 잘된 셔츠를 입고 젊은 여자와 고급 초밥을 먹는 사이에, 그 등 뒤에는 집안일과 육아에 쫓기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가게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은 본래는 숨어야 할 존재가 갑작스럽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문장으로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축약이 된다.
내가 집 밖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여러가지를 배우고 사회 생활을 맘 편하게 하는데에는 가정의 대소사 및 집안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기여가 굉장히 크다는 것.. 하지만 정작 그 집안일을 맡은 사람은 사회 생활을 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지워진 존재가 된다는 것...
그런 것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쓸데없이 너무 자세한 식사 재료와 술 등에 대한 묘사로 인해 스토리가 산만해져서 그 부분은 좀 훌훌 넘기긴 했다. 그래도 그렇게 자세한 묘사를 함으로서 아기 엄마가 그만큼 미식에 제법 식견이 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근데 음식점을 나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들이 갑자기 함께 길을 나서는 건 너무 개연성도 없고 무슨..ㅋㅋㅋ 너무 뜬금없고 인위적이어서 좀 짜쳤음.
5. 서 있으면 시아버지라도 이용해라
이혼한 남편의 아버지(전 시아버지)가 본인을 거둬달라고 해서 같이 지내게 된 이야기. 애초에 남편과 외도로 이혼했는데 시아버지가 그런 아들이랑은 살지 못하겠다고 뛰쳐나온 것부터가 현실성이 뒤지게 없다 ㅋㅋㅋ 근데 뭐 소설이니까 뭐~
모든 집안일과 육아를 책임져주는 조건으로 주인공은 시아버지를 거둬주게 되고, 그런 시아버지로 인해 가사 및 육아에서 해방되는 이야기이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엷게 화장을 하고 정원에 물을 준 다음, 남편이 손수 느긋하게 내리는 커피에 맞춰 토스트와 햄에그를, 아들의 취향인 일식 조식을 만든다. 아들을 회사에 출근시키면 포메라니안 강아지인 오찻피를 산책시키고 장을 봐 온 뒤에는 이웃과 교류, 집 청소, 남편을 위해 또 점심을 차리고 다시 정원 손질, 청소, 저녁 준비..... 솔직히 경쟁 카페가 많은 사무실 밀집 지역의 카페에서 점장을 했을 무렵의 나보다 시어머니의 루틴이 훨씬 힘들어 보였다.'
'밖에서 돌아오면 어김없이 음식이 준비되어 있고 에니시가 아무 탈 없이 잘 있다. 그것만으로 경직되었던 몸의 중심이 스르르 녹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회생활에 기력을 다 빨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가사일과 육아에 신경을 안 써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상기시켜주었다.
수면모드에 들어가면 의식이 잠드는 것도, 전원을 꺼버리면 의식이 사라지는 것도 인간과 다를 것이 없다.
인간과 의식을 가진 로봇을 구분짓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무엇이 그렇게 다르길래 그토록 인간만 존엄하며 다른 생명들은 이용해도 된다고 믿고있는 걸까 싶다.
소설에서는 법률적인 해석의 내용과 피조물의 존엄 등 안드로이드를 재판하는 과정에 무게를 두며 철학적인 면을 조명하였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이나 내용보다는 생명윤리나 과학 윤리 방면이 두드러지는 느낌인데
뮤지컬에서 배우들이 안드로이드 로봇인 '아오'를 연기하는 걸 본다면 아오가 의식으로 인해 설렘과 고뇌를 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고 표정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스토리에 더 몰입할 수 있어서 정말 재미있을듯....
'아오' 역할 유태양씨가 부르는 '내 피는 파랑'. 아오의 감정이 잘 담긴 노래인듯 함.
좋았던 구절들
삶의 의미는 의식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지만, 개별적 의식이 스스로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그 의식에게만 참이며, 다른 의식에게도 참인지 거짓인지는 논리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타인의 목소리는 공기를 통해서만 듣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자기 몸을 통해서도 듣습니다. 그래서 남이 듣는 자신의 목소리와 자기가 듣는 자신의 목소리가 다릅니다.
안드로이드가 자연이 아닌 공장에서 생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생명공학을 통하여 수많은 신생아들이 실험실에서 탄생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존재가 헌법이 보호해야 할 피조물 또는 생명체인지 여부는 '공장이나 실험실에서 생산되었느냐, 자연에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그 존재의 실질에 비추어서 판단해야 합니다.
어떤 주체는 본래 그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경우에만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의 자유가 없으면, 책임을 물을 근거도 사라집니다.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갇혀 있죠. 그 상태에서 자기에 대한 온갖 집착과 욕망이 생겨나고요.
그보다는 조금 더 깊이가 있고 작가가 얼마나 많은 사색을 하였는지가 엿보인다. (굉장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ㅋㅋㅋ)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뜬구름잡는 소리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삶의 방향을 정해주진 않아도 방향을 정하기 위한 생각을 정리하는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어떤 자세로 일상에 임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해주었던 점이 좋았다.
근데 뒤돌아서면 까먹게 된다....ㅋㅋㅋ
작가가 자신의 '사색'과 '독서'의 뽕에 너무 취해있는 것..이 보였다. 나쁘진 않았지만 좀 피식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가진 내면의 강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그가 무엇을 경멸하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는 일상과 철학을 잘 말해주지 않는다. 자신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무엇을 경멸하는지를 보면 우리는 그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으며, 어떤 철학으로 점철된 미래를 살게 될지 짐작할 수 있다.
일상에서의 작은 성취가 중요하다. 누구나 처음과 시작이 있고, 그 때 자신이 선택한 방법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대가의 조언을 그대로 따르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부여할 수 있도록 작은 성취를 쌓는 시스템을 견고하게 만들어야 한다.
언제나 모든 변화는 그렇게 되겠다는 자신의 의지에서 시작한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내릴 한 문장의 명령이다. 자신에게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라.
함부로 멘토를 만들지 말라. 쉽게 누군가를 멘토로 섬기지도 말라. 당신의 가장 진실한 멘토는 당신이 어제 보낸 시간이다.
또 남자 여자의 측면뿐만 아니라 인종과 아동의 관점에서도 포르노/포르노 산업을 다루고 있다.
포르노의 이면을 묘사하느라 굉장히 선정적이고 직설적이라 역겨운 묘사가 다수 있어서 읽기 힘들기도 했다.
극단적이고 파괴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보다 더 포르노라는 세계와 포르노의 영향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포르노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책에서는 사실 포르노 산업에 의해 생성되고 길러진 욕구라고 말한다.
또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주체적 섹시'를 갈망하고 아름다운 '여성상'을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포르노 산업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포르노는 자신들의 판타지를 그린 것이라 말하지만 포르노는 개인이 만들어낸 판타지가 아니라 공장에서 대량생산해낸, 정형화된 상품이라는 것이며, 그 포르노들을 소비하다 보면 사람들은 더 자극적이고 더 폭력적인 것을 원하게 된다.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어느 교도소의 아동 포르노 소지죄로 수감된 사람 중 '소아성도착자'의 정의에 들어 맞는 사람들은 없었으며, 일반적인 포르노에 질려 더 비정상적인 장르를 소비하다보니 아동 포르노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포르노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히, 그리고 얼마나 넓게 퍼져있는지 피상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있는 성인이라면 꼭 한 번씩은 봤으면 한다.
포르노가 제작되는 환경이 불법이든 합법이든, 그 영상이 출연자의 자유의사로 촬영되었건 전혀 모르는 새에 불법적으로 촬영되어 유포되었건 포르노가 일으키는 사회적 영향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실제 여성이 출연하지 않으므로 피해자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리얼돌이나 게임 캐릭터, 포르노만화와 야설도 그것이 끼치는 영향에 관해서는 여느 포르노와 다를 바가 없다. 다크웹에서 유통되는 극단적인 하드코어에서부터 남자들에게는 너무나 흔한 '야동', 대중문화에 새어나오는 성적 코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포르노라는 말을 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각기 이름이 다르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들의 삶과 사회적 지위에 끼치는 영향은 똑같이 크기 때문이다.
삶의 희노애락이 담겨있으며 전개가 속도감 있고 사투리와 옛날 말씨가 매우 실감나서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가만 보니 문창호에 손가락 둘레만한 구멍이 대여섯 개 나 있다. 그리 들어온 햇빛 한 줄기가 전빈의 눈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주룡은 손 하나를 뻗어 전빈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준다. 눈을 감은 채 깊은숨을 내쉬는 전빈을 주룡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뜬금없이 어머니에게 들은 실없는 물음이 그 얼굴을 보는 사이 떠오른다.
통화현에서 곱기로 으뜸가는 것이 무엇인지 나 알았소. 그것은 내 서방. 이 생각에 주룡은 의기양양해진다.
서방만 한 게 없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국가에 살기를 바랍니다.
임자가 이런 사람이어서 나는 좋았에요. 주룡은 바로 답하지 못한다. 그런 말 말지. 이미 한 번 버린 아내에게, 이제는 아주 두고 떠날 사람에게 그리 다정한 말은 말지. 데리고 떠나지 말지. 정 주지를 말지. 첫날밤에 소박을 맞히지. 이럴 바에는. 주룡은 손을 내밀어 전빈의 얼굴을 감싼다.
부모를 따라서 이주하고, 시집을 가래서 가고, 서방이 독립군을 한대서 따라가고, 그런식으로 살아온 주룡에게는 자기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저 자신이 정하는 경험이 그토록 귀중한 것이다.
주룡이 말할 때는 미심쩍고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회원들이 달헌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에 슬그머니 짜증이 나려 하는 것을 꾹 참으며 주룡도 달헌에게 박수를 보낸다.
"시방까지 배운 바론 노동자가 으뜸이구 근본 되는 계급인데 실지로는 에리뜨들이 계도와 계몽의 대상으로 보구 있다. 이거이 최근 나의 불만입네다."
우습지 않습니다. 내가 이겼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당신 아주 탁월한 사람입니다. 싸우려고 태어난 사람같습니다. 본때를 보여주시오. 나 따위 것 우습게 여겨버리시오. 알겠소?
주룡 씨 이미 잘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부재중인 동안에도 모임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토론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고. 기만적인 말처럼 들리겠으나 나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주룡 씨처럼은 할 수 없습니다. 여성 고무 직공의 당사자성을 흉내 내거나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룡 씨는 얼마든지 나의 몫을 가져갈 수 있지요. 사상이니 이론이니 하는 것은 배워가면 되는 것이니까.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정말 오랜만의 감동적이고 감성적인 소설이었다.
경마장에서 말을 타기 위해 만들어진 기수 로봇 콜리,
경주마로서의 수명을 다해 곧 죽을날만 기다리는 말 투데이,
로봇을 좋아하지만 친구 사귀기는 서툴고 언니와 엄마에 대한 부채감을 지고 살아가는 연재,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를 이끌고 매번 경마장에 가는 은혜,
죽을 위기를 이겨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꿈을 포기한 채 두 딸을 키우며 버티는 보경.
등장인물들을 보면 알겠지만 저마다의 사연이 다양하다. 그만큼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도 다양하다.
감정을 느끼고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 등 오로지 감정적인 면 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인권이라든가, 동물 복지에 대한 생각과 같은 사회 문제 또한 반영되어 주인공들이 겪는 일에 현실성과 공감성을 부여한다.
사람은 다 비슷하다지만 너무나도 다른 입장에서 살고있는 인물들에서 보편적인 감정을 뽑아내어 어루만져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정말정말 감동받았다~!
다양한 하늘이 존재했지만 콜리는 그중에서도 구름이 선명한 날을 좋아했다. 여기서 '좋아했다'는 더 자주, 더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봤다는 뜻이다.
세상이 조금만 더 자신을 남들처럼만 대해준다면 은혜는 사이보그따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 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세상은 연재와는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많은 것을 탄생시켰다. 그제야 삶의 격차가 어느 틈을 비집고 생겼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건 연재의 균열이라기보다 부모님, 그리고 그 부모님보다 더 먼 부모님의 삶 어디에선가부터 천천히 시작된 균열일 것이다. 연재가 스스로 절대 여밀 수 없는 크기로 말이다.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마음을 떼어낸다는 게 가능한가요?"
"응. 이러다 나도 죽겠지, 죽으면 다 그만이지, 하면서 사는거지."
한 해 1만여 마리 정도의 동물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을 감았다. 인간도 살기 비좁은 땅이라는 이유로 동물들이 사라져야 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생태계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모두가 입을 모아 동물의 생존권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의 인간들이 여전히 개 공장에서 태어나 펫숍으로 팔려 온 강아지를 구매했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를 발로 찼다. 털이 뭉친 노견은 너무 못생겼다 느꼈으며 갓 태어나 젖도 떼지 못한 개만이 가족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고양이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없이 집에 들였다가 털이 너무 많이 빠지거나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유기했고 같은 케이지 안에 넣어 서로 죽이는 햄스터를 징그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수온과 염분을 맞추지 못해 떼죽음당한 열대어를 변기통에 흘려보냈다. 새를 위해 새장을 하늘이 보이는 베란다에 놓았고 그 해에 유행했던 동물들은 반짝 개체수를 늘렸다가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다. 가축이 된 짐승과 인간과 친한 몇몇의 동물들 빼고 모든 동물들은 몇 세기 안에 사라질 것이다. 소리 소문 없이.인간이 필요로 하지 않으면 죽었다. 복희가 말했던 이 행성에서의 동물들의 위치였다.
콜리는 공감을 느낄 수 없는 개체였지만 공감하는 척 움직이게 만들어졌다. 어차피 사람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게 공감이었다. 보경은 콜리를 앉혀놓고 몇 번 대화를 한 후에야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들을 수 있는 귀와 끄덕일 수 있는 고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바다에 빠지면 누구를 가장 먼저 구할거냐는 질문이 나왔어요. 그게 소중한 사람의 순위를 매길 때 사용되던데. 그런데 참 이상한 비유예요. 왜 꼭 절망의 상황에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누구에게 먼저 줄 거냐는 비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아쉽다.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은 지 오래돼서 완전히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쉬움에는 약간의 설움이 섞여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아쉽다는 단어를 꺼내면서, 아쉬움에 면역되지 않은 마음이 설움에 정복당하는 듯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었다가는 지수에게 평생 놀림을 받을 것 같았으므로 연재는 꾸역꾸역 참았다.
연재는 볼 때마다 새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인간의 눈이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가 다른것을 볼 수 있었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