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현실에 대한 고찰과 의견을 써낸 에세이.
책 크기도 작아서 들고 다니기도 좋고 각 소주제가 읽기 좋은 분량이라 짬날 때 읽기 좋음.
맘에드는 구절, 생각해 볼만한 구절이 많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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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이라는 명목으로 여성들에게 덮어씌우는 굴레가 많으니까요. 그것에 대해 저항을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모성은 반드시 아기를 직접 낳아서 키우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식만을 싸고도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모성은 타인을, 특히 약자를, 아우르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당한 희생만을 강요하고 좁은 가정의 틀에 갇히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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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물과 사람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시간에 걸쳐 본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망막에 맺히는 상이 아니라 뇌를 거쳐서 오는 시각 정보로서, 거기에는 기억, 판단, 감정 등이 개입되고 결합된다.
우리가 보는 행위라는 것 자체에는 주관성이 가득하다는 걸 깨닫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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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다른 뭔가를 먹거나 마시는 행위보다 자의식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커피의 맛과 향 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시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은근히 즐긴단 말이지.
꼭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도 멋진 곳에서 좋은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충전하는 걸 보면 맞는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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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나는 내 불편함을 말해야 한다. 비록 그 변화가 산을 숟가락으로 떠서 옮기는 일이라도...
'내 일이 아니지만 나서는 것'과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는 것' 은 어떻게 다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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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한쪽에선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어가고, 이 도시에도 일상의 차별과 모욕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태평하게 일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영화를 만드는가" 식의 비평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예전부터 여러 예술 작품에 대해 그런 종류의 비평을 종종 봐왔지만, 그런 식이라면 모든 문학과 예술은 획일화된 종류만 남을 것이다. 왜 세상에 추악한 부분이 많다고 해서, 그와 함께 엄연히 존재하는 아름다운 부분에 초점을 맞춘 작품을 만들면 안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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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에 공정하게 돌아간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믿음은 부당한 피해자를 볼 때 손상되어 버리고 우리는 불안에 빠진다. 이 때 그 피해자가 뭔가 원인을 제공했을것이라고 합리화해서 공정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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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또는 더 이상의 피해자를 방지하기 위해 내 편의와 즐거움을 감소시키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할 때 거기 동참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않다. 우리는 미투를 어떻게 대했나? 초기에는 충격에 휩싸여 피해자를 격려하며 가해자에 분노했지만, 미투가 사방에서 터져나오고 인기 많던 연예인 몇몇이 자취를 감추고 우리 일상의 언어와 행동거지, 관습들이 문제가 되자 피로감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았던가? 심지어 석연치 않은 일부 사례를 부풀려 많은 확실한 피해자들을 포함한 미투 운동 전체를 폄하하거나 조롱하는 움직임도 나타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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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그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다.
그러니까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좀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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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는 왜 이렇게 강간 장면이 많은가?"
거기에 여자들의 목소리는 없었다. 까칠해도 결국 포용하고 인내하는 모성이나 떨어지는 꽃잎같은 스러짐의 미학을 선보이는 희생자로서 자기 목소리 없이 여성의 몇몇 정형을 재생산하면 미학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었다.
강간, 폭행 등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나는 범죄들을 그린것이 무엇이 잘못됐냐는 말이 많은데, 영화든 미술이든 그 범죄 장면들을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해서, 단순히 자극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피해자의 이야기, 피해자의 감정, 피해자에 입장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이 제3자의 입장이나 가해자의 입장에서 범죄 장면을 그려낸다면 피해자는 자극을 주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스너프 필름과 뭐가 다르냔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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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폭력은 우리 인간사의 일부이기에 예술이 그것을 다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문제는 그 태도와 방식이다.
성폭력의 대상인 여성은 '아름답게 스러지는 희생자'가 아니면 이효석 단편에 나오는 분녀처럼 겁탈을 즐기게 되는, 남성의 복화술을 통해 말을 하는 인형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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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주색잡기'나 '일탈적' 삶을 치열함의 외피로 포장하던 시대는 끝나 가고 있으며 그것은 "여성을 주권과 인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타자화된 '사물'로 대하는 태도"에 공분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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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문학을 영원한 '아나키즘'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문제의 손쉬운 해결을 거부하는 '끝없는 질문태'로서의 문학을 지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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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성이 진정한 파격과 전복이 되려면 사회와 젠더 권력에서의 약자가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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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축제는 사회 통합을 위한 종교 의례가 기원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놀이 본능이 문화로 표현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 놀이 본능을 무시하고, 방송에서도 마치 명절이 민족주의 의례를 위한 날인 것처럼 "민족 고유의 명절"과 "정성 들여 치르는 차례"만 강조하니, 소셜미디어에서는 해마다 "명절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라는 소리만 늘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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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요즘처럼 눈의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물 꾸러미였다. 원래 크리스마스 트리는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꼬마들에게 나눠주고 사라지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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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타인이 있는 한 그 시선과 판단을 받을 수 밖에 없고 그걸 의식해 완전히 주체적일 수 없게 되므로, 타인의 존재 자체가 지옥이다. 하지만 또한, 처음부터 무엇이 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냥 태어난,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근거를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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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리끼리 모여 같은 생각이 메아리치는 '반향실'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 메아리를 즐기면서 진위에 대한 관심은 덮어둔다. 그러한 '반향실'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의심하는 토마'이다.
'반향실'이라는 표현이 좋았다.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유유상종은 벗어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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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러다가 '할 수 있다'가 작동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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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유명인들의 업적과 행위의 무게를 따져서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많이, 자주 보여지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즉 '보여짐'의 질보다도 양을 중시한다는 얘기다. '명예'나 '평판'이 아닌 '유명세'를 추구한다. 바우만은 쉴 새 없이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심리가 바로 이 '보여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이거 완전 공감. '유명세'를 추구한다는 말 정말 맞는 것 같다.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셀럽'들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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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뭐라고 쓰든지 신경 쓰지 마라. 단지 얼마나 많이 쓰는지 신경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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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보고서에 불쾌감을 느낀 이유는, 일단 그 전제에서 사람들이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이기에 앞서 국가 경제의 자원 혹은 부속품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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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와 육아 등 돌봄 노동은 '사랑의 노동'으로 아름답게 표현되면서도 정작 경제 시스템에서 그 실제적 중요성과 가치는 막연하게 다뤄지고 도리어 저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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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성공에 행운이 작용했음을 알 수록 다른 이들에게 관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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