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함으로 인해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던 관계와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주로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를 서술하는 식인데, 그 시절에 있었던 일, 그 때의 감정을 서술하며 관계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감정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가 섬세해서 계속되는 감정의 파도가 버거울 정도.
한 번에 다 읽기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너무 애틋하고 섬세하여 단편 영화를 한 편 본 듯하니 하나를 다 읽고 잊혀질 때쯤 또 하나를 꺼내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ㅎㅎ
1. 그 여름
학창시절 첫사랑 그리고 연인관계, 식어가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 보편적이지만 그렇기에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음.
2. 601,602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있을 법한, 실제로 있었을 만한 이야기. 남동생을 열렬히 원하는 집안의 여자아이와 옆집에 사는 친구이야기.
옆집 친구가 불쌍하면서도 자기 얘기가 아니지 않음에 비참함을 느낀다.
남자 아이를 낳지 못해 핍박을 받는 엄마의 곤란함을 목격하며 할머니를 싫어하게 되고, 남동생이 태어나며 역설적이지만 희망을 느낌. 사실 희망을 느꼈다는 건 내 주관적인 생각이고 '우리는 행복해질거야' 라고 주인공이 생각했지만 '정말 행복해질까' 하고 불안해 하면서 외면하려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만도 같다.
3. 지나가는 밤
자매 관계에 대한 이야기. 자매지만 친하지 않은 관계. 엄마의 기일때만 만나는 관계이다. 어릴 시절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애증은 있고, 서로가 필요하지만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움에서 오는 애틋함이 있다. 어쩐지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니나 자매를 떠올리게 한다.
4. 모래로 지은 집
이 책에서 긴 편에 속하는 두 소설 중 하나. 상처 투성이 '공무'와 나약한 '모래', 그리고 '나'의 이야기.
상처를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간상을 그려내고, '나약함'이란 무엇인가.. 하는 마음 이야기...
만남과 헤어짐, 사랑, 청춘, 용기 그리고 내가 공무와 모래를 통해 알아가는 '나'의 감정. 세사람의 성장통.
처음엔 밋밋하다고 느껴지는 소설이었는데 읽어갈수록 세 사람의 캐릭터에 스며들어 애틋한 감정이 느껴졌던 소설이다.
5. 고백
학창시절 친구와 있었던 이야기를 고백함.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레즈비언임을 밝혔을 때, 다른 친구와 '나'의 반응으로 인해 친구가 자살하고, 그 이후 틀어진 관계와, 다시 재회했을 때의 감정을 고백한다.
6. 손길
나를 거두어주었던 어렸지만 반짝였던 숙모에 대한 이야기. 예전 나를 잠시나마 키워주었던 숙모의 나이가 되어 느끼는 감정들과, 이별과 재회를 그려내었음.
7. 아치디에서
'하민'과 '랄도' 두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지만 사랑은 아니다. 두 사람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우정이라기엔 너무 애틋하고도 건조하다. 사랑의 양상이란 어떤것일까. 삶을 뒤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잠시 정체된 지점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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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나는 공무와 포옹하고 싶었다. 만약 내 옆에 모래가 있었더라도 나는 똑같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 애를 껴안아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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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골목 끝까지 걸어가 바닥에 침을 뱉었어. 입속에 고인 초콜릿의 단맛이 불쾌하게 느껴져서. 그 단맛이 입 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서. 그 때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참 더럽다고 생각했어. 더러운 말이라고.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경멸하고 또 경멸할 거리고 다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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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그 때의나는 생각했다. 겉으로는 울고 있는 모래를 달래면서도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모래를 단죄했다.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 다시 들어가놓고 나와 공무 앞에서 외롭다고 징징대다니. 모래의 등을 두드리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진짜 고통이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애처럼 울고 있다니.
(다른 사람의 슬픔을 단죄한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겉으로는 타인을 달래주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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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하지 못했다. 어느 한 사람 울지도 못하고, 완성되지 못한 문장만을 조금씩 흘려보낼 뿐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후 몇달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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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몰아붙이던 남자친구에게조차 나는 의존했었던 거지. 내가 내 힘으로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해 자꾸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했던 거야. 내가 기대어 서 있는 벽이 자꾸만 무너지고 벽이 아니라 나를 해치는 돌덩이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본인을 갉아먹는 관계인걸 알면서도 쉽사리 놓지 못하는 저 마음이 공감이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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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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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 것인지 여자로부터 배운 셈이라고 혜인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사람은 그런식으로 쉽게 행복해질 수 없는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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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민이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 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는 게 그녀에겐 올바르다는 가치의 문제라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할 때, 그래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세 동물을 기르는 형태의 공통점은 발만 겨우 디딜 수 있는 작은 공간에 동물 여러마리를 꽉꽉 채워서 기른다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는 동물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고 결국 폐사로 이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비록 잡아먹기 위해 기르는 동물이지만 그런 동물들에게 최소한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되는데,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충분한 공간을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분한 시간을 보장을 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짚어줬던 것이었다. 항상 '동물복지'하면 자유롭게 걷거나 뛰고 잘 수 있는 환경에서 동물들을 기르는 것만 생각하곤 했었는데, 동물들이 충분히 자기 삶을 누리지 못하고 인간에 의해 특정한 시기에 도살당한 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었다.
이런 것 외에도 고기로서 기르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의 경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며, 동물 농장 사업에 얽힌 이야기들도 알 수 있다. 우리가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는 사료의 원료가 되는 줄 알았는데 사실 개 농장에서 개들의 밥으로 사용된다는 건 생각치도 못했다. 개 농장에서 짬밥은 개밥으로서 사용되고, 짬밥 사업 또한 수익을 창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농장 사업 구조가 단순히 독립된 한 사업으로서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다른 이해관계와 얽혀 있기도 하다는 걸 알게되었는데, 그 안에서 먹고 살기위해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그들을 보며 손가락질 하는 것은 선민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업 측면 외에도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묘사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몸이 고된 농장 일 특성상, 젊은 사람은 거의 없을 뿐더러 외국인 노동자가 태반인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조금) 엿볼 수 있고 매매혼에 대한 언급도 조금 있다.
아무튼 알게 되는 것도, 생각해 보게 되는 것도 많은 책이니 읽어볼 만 하다. ~~~ 그럼 20000
아래 사진은 돼지 스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사진.
돼지 농장에서는 아래와 같은 돼지 스톨에 돼지를 사육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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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에 대해 수치 위주로 접근하게 되면 금방 이해하고 또 금방 잊는다. 삼풍백화점은 1995년에 무너졌고 502명이 죽고 937명이 부상당했으며 재산 피해액이 2,700억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읽은 사람은 자신이 이 비극을 '안다'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대상을 파악했다는 감각은 내적으로 형성된 불안감을 해소시키며 이때 생긴 만족감은 계속해서 의심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동력을 감소시킨다. 이해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계속해서 다른 세상일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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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지란 도구는 갇힌 쪽이나 가둔 쪽 모두에게서 최악의 자질을 이끌어 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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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란계 수평아리들에게 매몰 처분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쓰레기차가 여러분이 집 앞에 내놓은 쓰레기 봉지를 수거해 매립지에 쏟아붓는 것만큼이나 규칙적이고 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병아리들에겐 방송사의 카메라가 찾아가는 일도 없고 어떠한 경악도 우려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 병아리들도 똑같이 비명을 지르고 살려고 발버둥 치지만 말이다. 상품 가치가 없는 것은 연민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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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차별은 혐오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된다.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우리 편'에 대한 사랑.
차별에 구체적인 형태를 제공하는 것은 혐오지만 그것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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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떼를 폐기시킬 땐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개에게는 고함을 지르는 것만으로도 느꼈다는 점은 인간 사회 속에 자리잡은 동물들이 온전한 삶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를 암시하는 듯 보인다.
먼저 그들은 상품이 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아주 비싼 상품이 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론 인간의 '친구'(그러니까 감정의 교류가 가능한 상품)가 되어야 한다. 너무 맛있거나 아니면 너무 못생겨서 '친구'가 될 가능성이 없는 동물들의 삶은 앞으로도 고달플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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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계 농장의 상대적으로 쾌적한 환경은 공장식 농장의 동물이 이중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첫번째는 가장 일반적인 제약인 공간의 감옥이다. 동물들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이런저런 노력들은 이 첫 번째 제약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식용 동물은 인간의 필요성에 따라 죽는 시기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두 번째, 바로 시간의 감옥에도 갇혀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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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들이 동물 복지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것과 그렇게 생산된 고기를 즐길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건강하게 동물을 길렀다 해도 그 고기가 시장에서 외면당한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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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도계 방식도 그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부작용이 아무리 심각하다고 해도 개 도살방식에 비할 바는 결코 아니다. 닭은 전기로 기절시키는 것이고 개는 말 그대로 전기로 지져서 죽이는 것이다. 두 경우가 똑같다고 하는 것은 비행기가 지면에 내려앉았다고 해서 착륙과 추락이 똑같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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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선량함을 의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된다.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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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역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이라도 관여할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IS가 이라크를 점령하며 무슬림이 아닌 민족에 대해 가한 집단학살을 다룬 집단학살 피해자의 자서전.
약 400페이지 쯤 되지만 하루만에 금방 읽었다
주인공이 IS로부터 겪었던 강간과 폭력, 그리고 주인공의 집단에 대한 학살 등이 묘사되어있으며 IS가 이라크를 점령하는 과정과 전쟁, 정치적 양상들이 이라크 내에서 살았던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술되어 있다. IS가 자행했던 비인각적인 일들은 과거 왜놈들 제국주의 시절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과 닮아있었다.
21세기 지구촌 어느 한 쪽에서는 아직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남성성이라는 '맨박스' 에 갇혀 남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남성들이 어떤 것을 관습화하고 대물림했는지, '맨박스'로 인해 남성 본인들이 어떤 부분을 희생했어야 했는지, '맨박스'에서 학습한 남성성이 여성을 비롯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얘기함.
굉장히 딱딱하고 어려울 수 있는 주제인데 에피소드가 많이 소개되어 어렵지 않고 술술 읽힘.
다만 글쓴이가 미국인이라.... 미국은 마초이즘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강하다보니 글에서 소개해주는 사례나 이야기가 극단적으로 보이고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조금 달라서 과장이 너무 심하다거나 일반화, 혹은 비약이라고 느껴질 수 있음. 하지만 사회적으로 학습되어 강요되는 남성성은 남성 본인들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해 악영향(물리적, 정신적, 성폭력을 모두 포함)을 미친다는 맥락을 이해해야 함.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전적으로 남성에게 책임이 있다'라는 점을 글 내내 강조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일부 미친놈들이 여자를 때렸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주의와 성차별이 빚어낸 현상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임.
침묵은 폭력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를 자아낼 뿐이며, 착한남성들이 나서야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함.
읽으면서 좀 아쉬운점은 글쓴이의 의견에 대한 근거가 조금 부족하고 위에서 말했듯이 일반화 혹은 비약이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좀 있었음. 하지만 어느정도 현실에서 목격하기도 하고 겪을 수 있는 부분이기에 공감하면서 넘어갔음. 그리고 뒤로 갈 수록 똑같은 얘기 계속해서 마지막으로 갈 수록 좀 노잼임.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폭력, 그리고 남초집단에서의 맨박스는 현실에서 충분히 관찰 가능한 현상이지만 자신은 아니라며 나는 그렇지 않으니 그러한 문제와 자신은 상관없다며 넘기면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 부분이 참 좋았음.
여자 버전으로 우먼박스라는 책도 있으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인상깊은 부분은 상당히 많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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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에는 이성애 우월주의와 호모포비아가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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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운 '남자'가 되는 법의 대부분은 여성의 성향이나 관점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는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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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여성들이 눈물을 보이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한다.
(실제로 남성이 눈물을 보이는것보다 여성이 눈물을 보이는 것에 더 관대하다고 느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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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신부의 손을 건네주는 행위는 전체 결혼 예식 중 상징적인 부분일 뿐이며 실제 사람을 소유물처럼 거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상징적 행위가 전통으로 내려왔다는 데에 시사점이 있다. 부친의 책임하에 있던 신부가 새로이 배우자를 맞이하여 그에게 귀속되는(한 남성에서 다른 남성의 손에 넘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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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의 거의 모든 곳에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이어진다. 주류 사회는 여성이 욕구의 대상이자 신체 부위로서 묘사되는 관행을 널리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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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남성의 수가 폭력적인 남성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선한 남성과 폭력적인 남성 사이의 공통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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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에 따르면 섹스를 할 기회를 낚아채지 않는다는 것은 남성으로서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남자라면' 응당 섹스를 원하고 요구해야 한다고 압박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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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남성들은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강하다고 느껴지는 여성과 사귈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남성들은 자신보다 키가 크거나 덩치가 큰, 힘이 센, 지위가 높은, 혹은 돈을 더 잘 버는 여성과 사귀는 것을 버거워한다. 방금 나열한 성질들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전형적인 남성성의 조건이며 이런 성질을 여성이 가질 경우 남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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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학습된 남성성은 대개 남자다운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을 강요한다. 터프하고 거칠고 근육질이고 과격하고 두려움 따위 느끼지 않으며 상처를 무서워하지 않고 언제나 상황을 리드하는 것이 남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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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연락망 제작, 여학생들 간의 2인 1조 시스템, 여학생들을 위한 교내 셔틀 차량의 증편 등의 논의되었다.(이런 경우 왜 여학생들을 위한 조치가 취해졌는지 생각은 안 한채 역차별이라는 발언이 나온다.) 하지만 이 방법은 남성이 저지른 폭력에 대처할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 대처할 책임을 여성들이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안전을 도모한다는 미명 하에 여성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대응책이었다. 남성들의 삶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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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성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고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 같은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대로 정확히 명칭을 정하자면 행위의 가해자인 남성을 지목하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 처럼 말이다.